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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기] 갓오브워 - 라그나로크

하얀코끼리끼리 2023. 1. 12. 19:11

갓오브워-라그나로크 표지(출처: 나무위키)

 

- 소개
갓오브워 북유럽 신화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는 전작의 시스템을 발전시켜 더욱 완성도 있는 후속작을 만들고자 했고, 그 결과는 훌륭했다. 
엘든링만 아니였어도, 최다 GOTY 수상은 갓오브워의 몫이였을 것이다. 

- 감상 
1. 줄거리 
작품은 라그나로크를 주요 소재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과 화해를 보다 심도 있게 다룬다. 

부자 간의 유대감은 흥미로웠으나 나의 관심 소재는 아니고. 
작품에서 예언을 다루는 방식과 등장인물들이 예언을 극복하는 방식이 무척 인상적이였다.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인물들은 예언된 멸망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멸망을 일으키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깨닫고 세계를 구원하는 플롯은, 이미 영화, 토르-라그나로크에서도 활용된 바 있다. 

2. 예언 같은 예측은 가능할 지도 모른다.
작품에서 아들은 라그나로크의 과정에서 아버지가 죽는다는 예언을 확인하고, 그러한 결말을 피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나, 자신이 무언가를 하면 할 수록 오히려 예언이 사실이 됨을 깨닫고 절망한다.

한편 아버지는 운명의 세 여신을 찾아가 예언에 관해 묻는다. 그러자 여신들은 자신들은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개인들이 살아온 길을 보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가 예측되기에, 그 예측된 선택들을 통해 미래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선, 예언을 어떤 신비로운 힘에 의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개념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부분이 인상적이였다. 이는 분명 타당한 부분이 있다. 성장이 어느 정도 된 사람은, 자신만의 성향을 가지게 되는데, 선택의 순간에 대체로 그 성향에 따라 선택을 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나름대로의 예언을 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기에, 그 사람의 다음 행동을 '예측'한다. 그리고 그 행동이 내가 예측한 바와 다르면 크게 당황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데이터를 기억 속에 입력하고, 그 사람의 성향에 대한 정보를 수정하고, 다음 '예측'을 준비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예언가다. 

이런 관점에서, 마이너러티리포트에서 다룬 개개인들의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도 불가능한 일은 아닌 듯 하다. AI에 개인의 과거 선택에 대한 정보를 입력하여 패턴을 파악할 수 있다면,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사람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현재의 AI 기술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3. 자유의지는 허구다.
아들과 아버지가 예언을 막기 위해 한 모든 노력들이, 사실은 모두 예언에 따른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아들이 분출하는 깊은 절망감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것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물론 현실에서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 하지 않는다. 사주, 운세 등이 존재하긴 하나, 개인적으로 이는 인간이 미래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낸 미봉책이라고 생각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흔히 인간만이 가지는 주요 특징으로 자유의지를 든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교리가, 하느님이 인간의 불행을 방치하는 이유에 대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자유주의 사상이 주류 사상으로 자리잡은 후 여러 문학 장르에서 자유의지를 숭상하였고, 현대의 SF 문학에서는 인간과 기계를 비교하며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녔기에 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자유의지라는 가치를 대단히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자유로울까? 

자유의지란 나의 생각과 행동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생각이야 당연히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런데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생각은 그 가치를 인정하기 어려우므로, 행동의 자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런데 생각해본 결과 나의 행동은 여러 측면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선 법, 관습, 도덕의 제한을 받는다. 
나는 무단횡단을 하면 안되고, 정해진 길로만 가야하며, 물건을 훔치거나 타인을 공격해서도 안된다. 타인과 대화 할 때도 정해진 방식에 따라 말을 해야 하지, 내 마음대로 말하면 안된다. 나는 사회적으로 해서 안될 행위들이 무수히 많다. 금지된 행위를 하나라도 할 경우, 나의 사회적 가치가 하락하고, 심할 경우 신체의 자유를 잃게 된다. 

그럼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가? 
이 경우에도 그렇지 않다. 타고난 기질과 환경이 주는 제한을 강하게 받는다.
허용된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자유의지로,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다. 
예컨대 내가 타고난 기질상 피를 극도로 싫어한다면, 나는 의사를 할 수 없을 것이다(시험을 봐서 자격증 자체는 취득할 수 있을지라도, 실질적으로 의료 행위를 못하는데 이를 의사라고 볼 수 없다). 
다른 예로,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데, 피아노를 전공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에게 그 정도 돈이 없다면, 실질적으로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 외에도 즐기고자 하는 취미라던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람의 범위라던지, 여러 방면에서 우리는 기질과 환경의 제약을 받는다. 

사람의 인격을 결정하는데 유전자의 영향이 중요한가, 환경이 영향이 중요한가, 하는 질문은 교육계에서 오래된 논쟁거리이다. 그런데 인격이 형성된 시점에서 유전자(기질)와 환경은 둘 다 큰 영향을 미쳤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크게 제한한다.

즉 우리가 실제로 선택하여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를 두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마치 인간이 만든 미로에 갇혀 치즈를 향해 길을 찾아가는 생쥐와 비슷하다. 왼쪽, 오른쪽 중 어느 곳으로 갈지는 선택할 수 있을지라도, 그보다 거시적인 차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 미로 속의 생쥐에게도 자유의지가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결국 우리가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자유의지는, 실상은 허구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순간 삶에서 크고 작은 선택들을 해야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져야 한다. 이미 선택의 경우의 수를 다 잘라버리고는, 결과에 대한 책임만 지라는 것이, 다소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세상을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불합리함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에서, 절망에 빠진 아들에게 아버지가 건네는 해결책은 이러한 불합리함을 이겨 낼 수 있는 작은 용기를 전해 준다. 
아버지는 말한다.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아라. 그저 매 순간 순간, 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판단을 해라. 

미로 속의 쥐에게는 치즈란 보상이 있다. 적절한 선택을 통해 미로를 돌파하면 보상이 주어진다. 
자유의지가 없으면 어떠한가. 매 순간 나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삶의 불합리함을 이겨내고, 끝내 보상을 쟁취하자.